3차원을 넘어서 - 보이는 세상 그 너머의 세상으로의 초대


물론, 오늘날의 현대예술이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대예술이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다른 방식을 보여주어,
그/로/인/해 새로운 공간을 인식하고, 나/아/가 조금이라도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능력마저 없어졌다고 단언하지는 말자.

<Beyond XYZ> 
X축,Y축,Z축이 성립하면, 3차원이 된다. 거기에 ‘시간’개념이 덧붙여지면, 4차원이 된다. 그러니 시공간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쓰는 것만큼 녹록한 개념만은 아니다. 게다가 3차원 이상의 공간으로 넘어서면, 이미 공간 안에 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니, 3차원에 익숙한 우기가 생각하는 4차원이상의 다차원 공간을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종종 작가라는 부류는 X/Y/Z축을 넘어서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보여줄 때도 있다. 김시내의 경우처럼.

 

애보트의 『플랫랜드』와 김시내의 ‘플랫랜드’

김시내의 <Beyond XYZ>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전에도 그는 작업에서 종종 공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잘 알려졌던 ‘시뮬라르크 공간에서의 새로운 숭고 New Sublime in the Simulacra Space’(2006)-브라우저 추상 Browser abstract 시리즈-은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는 창인 웹 브라우저 자체를 독립적인 요소로 활용하여 새로운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였고, ‘사이렌의 노래 Siren's Song’(2008) 등과 같이 주어진 공간에 맞춘 설치작업을 해오기도 했다. 또한 이전 작업은 공간 자체에 대해 언급하기 보다는 공간과 얽혀있는 사회적인 혹은 정치적인 의미의 맥락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미디어를 활용한 자본주의 비판으로 읽혔다. 
여전히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번 <Beyond XYZ>에서 보이는 공간이야기는 이전 작업과 닿아 있으면서도 앞으로 그의 작업을 예상할 수 있는 변화의 조짐들이 보인다. 우선 <What makes your heart beat?>(이하 <What makes>) 전시에도 소개되었던, 그리고 작가노트나 그의 작업에 대한 언급에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플랫랜드’의 이야기가 여전히 작업의 근저에 깔려있다. ‘여러 차원들의 이야기 A romance of many dimensions'라는 흥미로운 부제를 가진 『플랫랜드 Flatland』는 에드윈 A. 애보트(Edwin A. Abbott)라는 학교 선생님이 쓴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판타지 소설이다. 무려 70년 전, 아인슈타인이라는 어마어마한 물리학자가 꼬마였을 때, 상대성 이론이라는 것이 세상에 나오기도 훨씬 전에 쓰여진 소설이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2차원 평면의 세계를 소개하는 글이고, 후반부는 라인랜드lineland, 스페이스랜드spaceland와 같은 다른 차원의 세상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시내는 <What makes>에서 'flatland'라는 작은 설치물을 선보인 적이 있다. 센서에 의해 바닥에 그려진 선을 따라 움직이는 사각의 큐빅박스, 그 박스는 또 천정에 매달린 금속 줄과 연결되어 있다. 주연화는 “천정과 금속 박스를 연결하고 있는 와이어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금속 큐브가 바닥의 원형(2차원)에 메어 맴돌고 있을 때 공간 안에 원추라는 3차원의 공간을 형성하는 매개체가 된다. 2차원과 3차원에 걸쳐져 있음에, 즉 하나의 차원에만 얽매여져 있지 않음에 희망이 있는 듯 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얽매어 있다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이전 작업은 작업이 놓이게 되는 어떤 공간에의 한계, 혹은 사회학적 해석이 가능할 수 있는 쪽에 기울어져 있다면, 이번 <Beyond XYZ>에서 소개되는 작업들은 의미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오히려 공간 차원에 관한 시각적 유희를 더울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시각을 조금만 비틀어보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볼 수 있다.”

‘어떤 물체를 변형시켜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거나, 
아니면 차원 안에서 크기를 변경하거나 위상을 변화시키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세계들을 
다른 차원에서 인식할 수 있다’ 
(작가노트에서)

<Beyond XYZ> 에는 애보트의 『플랫랜드』의 어조가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마치 그가 본/알고 있는 세상을 안내하는 사람이라도 되듯이, 관객들에게 “자, 이런 공간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이런 공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며 물음을 던진다. 드라이브를 하다가 문득 창밖의 가로수를 보며, 왜 우리는 나무들의 윗부분밖에 볼 수 없는 것인지 의아해지면서 구상했다는 ‘beyond flatland 설치’는 잔디 축을 기점으로,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동시에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다고 지표에 감춰진 뿌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우리는 종종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무시하며 지낸다. 줄기만 보이는 나무가 실재로 뿌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듯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이면에 대한 것들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만일 현실에서 우리가 이 둘을 동시에 볼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이 그저 나무 한 그루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이 전체적으로 그렇게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궁극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보이는 것의 이면에, 아니 어쩌면 보이는 것과 동시에 보이는 것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함께 보인다면’ 어떨까. 단순해 보이는 그의 설치작업은 생각보다 많은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beyond flatland’ 애니메이션 역시 유사하다. 이미 SF 영화나 타임머신 이야기에서 익숙한 현재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이행. 아니 현실공간과 다른 차원의 공간의 병행적 존재.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이 공간 안에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평행우주(pararell universe)의 존재를 보편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순간 무엇이 달라지게 될 것인가. 그래서 공간 안에 또 다른 공간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단순한 화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인덱스가 없는 공간을 구축하다.”

사실 이번 작업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새롭게 선보이는 3D 프린트 작업이다. 그의 작업을 소개하는데 있어 아주 빈번하게 실재와 가상, 시뮬라크르로 설명되면서 보들리야르가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이미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라던가, 시뮬라크르에 대한 이야기는 누차 들어왔으니 과감히 생략하기로 하고, 그의 작업으로 들어가보자.
‘최후의 만찬 Last supper’ 는 3D로 제작한 프린트/애니메이션 작업이다. 미술사를 통해 이처럼 빈번히 반복되었던 주제를 찾기도 어려울 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주제인 ‘최후의 만찬’을 작가는 작업의 전면에 내세웠다. 제목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그림자가 작품을 충분히 오도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가 3D 작업의 첫 주제로 굳이 최후의 만찬을 선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그의 작업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숭고 sublime’라던가 ‘최후의 만찬’과 같은 단어들이 제목에 곧잘 등장 한다. 비록 관객에게는 아무 연관성이 없이 보일 수도 있지만, 작가도 인정하듯이 김시내의 작업은 어떤 면에서 종교적인 것과 늘 닿아 있었고, 어쩌면 종교적인 차원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실존한다고 믿는 공간에 대한 관심과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평행우주론을 믿는다면, 사실 종교적인 차원이 현실 안에 공존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을까. 종교에 대한 지점은 이쯤해서 마무리하고, 3D로 만든 ‘최후의 만찬’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3D‘최후의 만찬’ 디지털 프린트작업은 정말 사진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사진처럼 보인다는 것은 대상을 앞에 두고 찍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디지털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실재처럼 만들어내는 것이 더 이상 놀랍거나 새롭지 않은 시대로 이끌고 왔다. 포토숍을 비롯한 소프트웨어를 조금만 활용할 줄 안다면, 사진을 리터치 하거나 새로운 합성사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언뜻 김시내의 3D ‘최후의 만찬’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관객은 어느 평범한 가정의 식탁을 찍은 것 같은 사진을 만나게 된다. 다만 사진 전반에 고르게 퍼진 ‘푸르스름한 잿빛’ 무드 때문에, 세팅을 해 놓고 찍었다기 보다 뭔가 컴퓨터 작업이 덧붙여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접시와 그림자 사이, 포크와 그림자들의 관계를 보면 어딘가 현실에서는 불가한 상황이다. 공중부양하는 접시, 지나치게 경건함을 자아내는 분위기 등등. 그 지점에서 김시내는 사진에 대한 관객의 추측을 넘어선다. 실제로 작가는 3D 소프트웨어를 통해 ‘사건을 재현해 내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포착했고, 3D 소프트웨어로 모델링 한 후, 가능한 모든 카메라 뷰를 시험한 다음에 가장 적절한 장면을 렌더링 하여 사진을 ’구축‘해 내었다.’(작가노트)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자, 가상의 공간이며, 가상인 동시에 실재의 공간이자 초현실의 혼합적인 공간이다. 
‘최후의 만찬’ -누군가에겐 실제 있었던 사건이자, 또 다른 이에게는 그저 허구적인 구성물에 불과할 수 있는 사건-을 김시내는 시각적으로 구축했다. 3D 소프트웨어를 써본 사람을 알겠지만, 3D 소프트웨어로 하는 작업은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구축적인 작업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때문에, 종교적인 사건은 이번 작업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에피소드였을지도 모른다.

 

여행으로의 초대

작품과 마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건 여행의 성격이 짙다. 그것이 회화이던, 미디어아트던, 혹은 그 어떤 다른 장르건 간에, 작품을 마주하는 것은 작가의 세계로의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본다면 김시내의 작업은 별반 새로울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Beyond XYZ>을 통해서 김시내는 몇 개의 레이어를 두고 보이는 것 그 너머의 세계에로 우리를 초대했다. 그의 전시를 본 후 누군가는 애보트의 『플랫랜드』가 궁금해질 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그래서 김시내의 작업 안에서 녹아있는 애보트의 입장이라는 것이 궁금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병행우주론이 궁금할 수 있고, 그 중 누군가는 김시내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혹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견고하리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이 궁금해질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작가의 작업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보는 사람의 세상에 대한 지평이 다양하고 넓어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아바타의 흥행보다 현대미술의 영향력이 떨어진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글. 큐레이터 신보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