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내 개인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를 졸업하고 지난해 7월 한국에 귀국한 김시내(1975)의 전시가 두 곳에서 열리고 있다. 종로구 원서동 space DA에서는 ‘일차원적 인간(One Dimensional Man)’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그리고 쌈지스페이스에서는 매해 3명의 젊은 신진 작가를 소개하는 ‘Emerging 8’에서 ‘사이렌송(Sirensong)’이라는 작품을 메인 작품으로 그룹전에 참여하고 있다.
이 두 전시에서 작가는 <일차원적 인간(One Dimensional Man)>, <눈먼자들(Blindness)>, <사이렌송(Sirensong)>, <구속(Redemption)>의 총 4점을 전시하고 있다. 김시내는 1999년 이래 웹 아트로 방향을 전향하고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2년 동안 아트와 기술의 접점을 탐구해 왔다. 기본적으로 웹 아트라 함은 컴퓨터 기술을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웹 환경을 이용하여 전시함으로써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만나도록 하는 것에 핵심이 있다. 웹 아트는 1970년대 이래 주요 이슈가 되어온 미술의 대중화와 민주화를 완성할 수 있을 듯한 환상을 작가들에게 주면서 수없이 많은 작가들이 밀레니엄을 전후로 웹 아트에 관심을 보였다. 웹상에 올려진 작품은 전세계의 사람들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정 지역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지는 것보다 더 큰 가시성을 획득할 수도 있다. 또한 엄청난 금액에 예술 작품이 거래되는 자본주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밀레니엄의 열기가 식으면서 웹을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했던 작가들은 차츰 웹 아트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우선 가시성에 있어 웹 아트 작품이 웹 상에서 전시되고 있기에 논리적으로는 전 세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작품이 전시되고 사람들이 직접 공간을 방문하여 작품을 관람하는 것을 능가하지 못했다. 쉽게 말해 내가 만든 홈페이지는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공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와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미술의 상업화라는 측면에서는 웹 아트와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 없이 미술 작품, 즉 오브제로서의 작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지속적으로 존재해왔으며, 심지어 2000년대 이후 작품 컬렉션에 대한 열기는 더욱 대중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찌 보면 밀레니엄을 전후로 한 웹 아트에 대한 관심은 밀레니엄이라는 단어, 그리고 인터넷 사용 환경의 전세계화가 가져온 장미 빛 환상일 뿐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웹 아트가 지닌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적용한다 할지라도 마지막 완성된 작품은 기술의 신기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예술 작품으로 인식될 수 있는 요소들, 혹은 개념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보여지는 방식에 있어서는 그 마지막 완성품이 물리적 공간, 즉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라는 형식으로 보여질 수 있어야만 한다. 비록 웹 아트가 지금 당장은 미술계의 권력 구조-미술관과 갤러리라는 물리적 권력 구조-에 굴복하는 듯 보여질지라도 말이다.
김시내가 지난 10년 동안 고민해오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웹 아트가 가진 모순성이라 할 것 이다. 그리고 현재 스페이스다(space DA)와 쌈지 스페이스에서 보여지고 있는 작품들은 웹 아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발을 들여 놓은 작가 김시내가 웹 아트가 지닌 모순성을 나름대로 극복하고 다다른 그녀 자신만의 예술 세계다.
현재 그녀가 보여주는 작품들에서 우리가 주요하게 만날 수 있는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환경이 기반하고 있는 가장 큰 시스템, 바로 기술과 자본이라는 거대 권력 구조 이다. 김시내는 기술 발달에 기반하여 형성된 ‘웹’이라는 새로운 생활 환경이 우리의 정신 구조 및 생활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문화가 우리의 삶과 가치관에 미치는 영향을 회화나 조각이 아닌 컴퓨터 및 기타 기술적 요소를 도입한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쌈지 스페이스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이렌송>에 대해 김시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어느날 문득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길거리의 나무들을 보았다.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그 자리를 이탈할 수 없는 나뭇가지들…나는 견고한 나뭇가지의 중심에서 매달려 있는 신을 보았다. 중심에 묶인 신과 자신을 유지하려는 맹목적인 결의를 가진 소시민들…오디세우스의 신화가 떠오른다. 사이렌의 유혹에 저항하는 오디세우스와 선원들. 사이렌의 유혹은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힘이다. 오디세우스는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가능성만이 있음을 안다…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봉하고는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어갈 것을 명령한다. 살아남고 싶은 자는 되돌릴 수 없는 유혹을 들어서는 안된다…들을 수 없을 때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사이렌의 소리를 듣는 것 이다. 그렇지만 마스트에 묶인 무력한 상태에서만 들을 수 있다. 유혹이 클수록 그는 더욱더 자신을 강하게 묶도록 만든다.”
김시내의 언급은 그녀의 작품에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억압하는 사회의구조와 그 구조 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심지어는 그 구조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휘둘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지적 이다. <사이렌송>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설치된 헤드셋을 착용해야만 한다. 헤드셋을 통해 나오는 기계음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종류의 기계 문명-핸드폰, 컴퓨터, 인터넷, 자동차, 등등등-을 상징한다고 여겨진다. 쌈지 스페이스에 걸려있는 또 다른 작품 <구속(Redemption)>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살아가는 컴퓨터 화면의 스크롤 바에서 시작된 작품 이다. 스크롤이 움직여질 수 있는 범위의 한계는 우리가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정보의 한계이자, 더 나아가서는 사회가 허용하는 우리 인식의 한계라 할 것 이다. 스페이스다에 전시되고 있는 <일차원적 인간>의 머리 위 나무 구조물은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사회 시스템을 상징한다. 그 아래에 서있는 관객은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결국은 작품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그 안에 머물러야만 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이상은 끊임없이 카메라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
조세 사라마고(Jose Saramago)의 소설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에서 제목을 가져온 <눈먼자들의 도시>는 273개의 전구로 구성된 작품이다. 실명이 전염병이 되는 상황을 기본 구조로 한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의 사회. 김시내의 작품은 이 눈먼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구조와 그 안에서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것이다.
BY 아트디렉터 주연화